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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숨은 주역 - 조선을 사랑한 사무라이 사야가 김충선

조선 후기 탐관오리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던 사회상 속 민란의 영웅을 소재로 한 영화 '군도'와 명장 이순신을 그린 영화 '명랑'의 흥행이 화제이다. 특히 한국영화사상 기간별 누적관객수를 계속해서 갱신하며 메가톤급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명랑'은 누적관객수 2000만명 달성도 가능하다는 예측이 나오는 등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을 작품으로 예견되고 있는데 뭇 사람들은 이런 영화들의 흥행이 영화 자체의 완성도와 작품성보다 무능하고 불신 가득한 현정권 나아가 정치인들에 대한 국민적 실망감의 표출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단순히 이런 영화들의 흥행에 기뻐할 수만은 없다는 영화제작자의 인터뷰가 공중파를 타기도 했는데 한번쯤 깊이 고찰하고 넘어갈 문제일 것 같다. 한편 이번 시간에는 의협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닌 실제 현실에서 정의롭고 충직했던 지도자의 모습으로 백성들의 모범이 되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 속 인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의 존재를 통해 현실 속 무능한 정치와 군의 모럴헤저드에 자그마한 경종이 되길 바람한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조선군은 조총을 무기로 기세등등한 왜군에 밀려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이렇다할 반전의 기회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왜군의 선봉에는 왜군 수장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대 장수 사야가가 이끄는 왜군 조총부대가 있었는데 그들은 부산진 점령을 시작으로 연전연승하며 북상하였고 이내 사야가부대는 조선군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후 해상의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내륙에서는 김충선 장군이 혜성처럼 나타나 전의를 상실한 조선군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뛰어난 전술 능력을 바탕으로 왜구를 격퇴하며 조선에 연이어 승전보를 안겨주게 된다. 특히 그는 조선에 생소하던 왜군의 조총을 노획하여 조선군에 보급하였고 화약제조와 조총사용법 등을 직접 가르치는 등 당시 조선군의 군사력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는데 그가 조직한 최초의 조선조총부대는 이후 울산성 대승을 시작으로 왜군의 조총부대를 상대로 선전하며 함락되었던 경상도 지역 18개성을 재탈환하는 등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갑작스레 출현한 영웅 김충선 장군에 대한 조선군내 의문 섞인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는데 결국 그와 관련해 밝혀진 충격적인 사실!!! 그것은 김충선 장군이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던 왜장 사야가와 동일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조선군의 영웅 김충선 장군과 조선군의 적장 사야가 사이에는 과연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전국을 통일하던 15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야가는 일본 유명 가문의 후계자였는데 사야가의 가문은 히데요시가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히데요시에게 끝까지 항전했던 이유로 가문이 초토화되는 환란을 겪게 된다. 더욱이 지방 다이묘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세력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싶었던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계획하면서 자신의 뜻에 반하는 다이묘들의 가족들을 볼모로 잡고 그들의 조선출병을 강요하게 되는데 사야가도 그렇게 임진왜란을 참전하게된 것이었다. 


하지만 히데요시에 의해 가문이 쇠락하고 가족까지 볼모로 잡히며 히데요시에 반감을 가졌던 사야가는 급기야 전쟁초 왜군에 의해 살해되는 조선 민간인들을 보며 히데요시의 야욕을 위한 명문없는 전쟁에 환멸을 느끼게 되고 당시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 장군에 투항하며 조선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후 사야가는 다른 조선군 장수들과 마찬가지로 왜군을 격퇴하는데 큰힘을 보태게 되는데 그의 공적은 권율의 추천으로 이어져 조선왕 선조로부터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게 된다.

 

 

 

이후 김충선 장군은 자청해서 오랑캐의 침입이 잦은 국경지역 방어를 진두지휘하였으며 1624년 '이괄의 난'때는 부장 서아지를 숙청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때에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광주 쌍령전투에 참전해 오랑캐를 퇴치하는 큰 공적을 세웠다한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고맙고 모범이 되는 인물로 사야가 김충선 장군이 일본에게 있어서는 달갑지 않은 인물로 그려질 듯 한데 부하 3000여명과 함께 투항한 사야가에 대한 일본내 기록은 미미한 것 같고 아직까지 여러가지 설이 난무하는 상태인 듯 하다. 일단 그의 일본내 출신 성분과 조선에 투항하게 된 경위 등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조차도 최근래에 들어서이며 그중 가장 신빙성 있는 자료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 고사카 지로의 소설 '바다의 가야금' 속 일본 철포부대를 이끌던 장수 사이카 스즈끼 마고이치로에 대한 기록이다.

 

일본 전국시대에는 지방 각지에 다이묘들이 이끄는 조총부대가 있었고 그중 사이카 지역의 조총부대는 용맹함과 총격술이 뛰어나 맹위를 떨쳤다고 한다. 그리고 스즈끼 마코이치로는 사이카 지역 조총부대를 이끌던 장수였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섬멸당한 사이카 지역 일족의 생존자로 언급되고 있다. 

 

 

끝으로 조선인보다 조선을 사랑했고 명분과 대의를 중시여기는 인물이었던 김충선의 일생을 보며 혹자들은 배신자 또는 그보다 더한 폄하의 말로 경시할지도 모르지만 국적과 인종을 떠나 정의로운 뜻을 품은 사나이의 한결같은 심지와 열정에 경외심을 갖게 만들고 현실 속 자신의 이권에만 눈이 멀어 모럴헤저드에 빠진 지도층의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선대인 김충선의 뜻을 이어 그의 후손들은 오늘날에도 한일 양국의 우호를 위해 여러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당당한 국민으로써 살아가고 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가면 김충선의 업적과 그의 후손들을 여전히 만나볼 수 있다고 한다.